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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기록적인 가뭄·홍수·폭염 등 기상이변 발생 빈도가 높아가고 있다. 기상이변은 농산물 생산 감소와 수급 및 가격불안을 야기해 경제사회 전반에 악영향을 미친다. 지난해 유럽 금융위기 이상으로 세계를 긴장시킨 사건은 기상악화로 인한 국제곡물 수급불안이었다. 금융과 경제위기는 국제공조와 자구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지만 자연의존적인 식량생산은 어느 나라도 자신할 수 없는 부문이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은 최근 2년 연속 무역규모 1조달러 달성으로 세계 8강의 무역대국이 됐지만 곡물자급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국 중 가장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세계 식량수급 불안은 앞으로 더 심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잇따르고 있다. 식량안보는 경제성장과 사회안정의 초석이다. 그 기초부터 새롭게 다져나가야 할 시점이다.
◆우리의 현주소=정부는 2011년 식량자급률 목표치를 새롭게 설정했다. 식량자급률(식용곡물)을 2010년 54.9%에서 2015년 57%, 2020년 60%까지 높이고, 곡물자급률(사료용 포함)은 2010년 26.7%에서 2020년 32%로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현실은 오히려 거꾸로 가고 있다.
2011년 식량자급률은 사상 최저수준인 44.5%로, 곡물자급률은 22.6%까지 떨어졌고, 특히 100%를 웃돌던 쌀자급률은 83%로 곤두박질쳤다. 곡물만이 아니다. 2012년에는 배추·무·양파 등 주요 채소류 재배면적이 줄고 작황도 저조해 생산량이 뚝 떨어졌다. 정부는 부랴부랴 비상수급대책을 세우느라 한바탕 소동을 벌여야 했다.
이렇게 된 원인은 하나다. 정부가 자급률을 높이겠다는 ‘의지(목표)’만 내세웠을 뿐 구체적이고 치밀한 ‘실행수단’을 마련하지 못한 결과다. 동아대 금융학과 황연수 교수는 “식량자급률 목표치는 산출근거가 불명확하고 목표 달성에 이르는 로드맵이 없어 최근의 ‘우리밀 재고파동’에서 보듯이 자급률 목표 달성에 대해 회의적”이라고 진단했다.
식량자급률을 높인다면서도 생산의 바탕인 농지감소에는 수수방관한 것이 단적인 예다. 농지전용 면적이 2000년 이후 한해 1만~2만㏊에 달했지만 농지감소를 막을 제도적인 보완 노력 없이 오히려 농지전용 규제를 느슨하게 해준 측면이 강하다. 그 결과 최근 쌀을 비롯해 생산감소가 두드러진 품목들은 재배면적이 지속적으로 줄어드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는 결국 잦은 기상이변과 맞물려 수급불안으로 나타나게 됐다. 이런데도 정부는 문제의 근원을 바로잡지 않고 땜질식 처방만 연발하고 있다. 수급불안 조짐이 보이면 수입농산물을 찾는 일이 일상화된 지 오래다. 필연적으로 국내 시장교란과 생산기반 약화를 초래하는 할당관세 확대와 저율관세할당(TRQ) 증량을 남발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식량자급률 제고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
◆인식 전환부터=식량자급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추진해 온 관련 정책들을 종합적으로 재검토해 실질적인 식량안보를 달성할 새 틀을 짜야 한다. 먼저 식량안보에 대한 사회적 인식부터 바꿔야 한다.
정부 내에서조차 부족하면 수입해 먹으면 된다는 시각이 팽배해 있다. 수입에 의존한 농산물 수급은 국내 생산기반을 약화시켜 만성적인 수급불안과 수입의존도 심화라는 악순환을 불러온다. 값싼 중국산 수입에 의존해 온 결과 최근 10년 새 자급률이 반토막나다시피 한 건고추와 마늘의 실상이 이를 잘 말해 준다.
수입 의존 대책은 소비자에게도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다 준다. 값은 싸지만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농산물이 밀려들다 보니 소비자들은 늘 불안할 수밖에 없다. 또 수입 때문에 국내 생산이 줄어들어 국산 농산물 가격이 비싸짐에 따라 구입 부담은 더 커져 이래저래 소비자의 후생이 저하되고 있다.
국내 생산기반을 강화하는 일이 식량안보의 첫걸음이라는 인식부터 새롭게 다져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정부는 식량안보의 정책목표를 정확히 규정, 제도화하고 이를 달성할 세부 실행계획 및 추진전략을 마련하는 일을 서둘러야 한다. 이와 관련, 전문가들은 정책대상을 곡물 중심에서 전체식품으로 확대하고 품목별 생산 및 수급관리대책을 제시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특히 식량자급률 목표달성을 위한 각종 정책수단과 유사시 수급불안에 대비한 식량안보 매뉴얼의 제도화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일본의 경우 식량흉작, 수출국 농산물 수출규제, 수입 대폭 감소 등으로 식량 수급에 문제가 생길 경우를 가정해 그 위험수준을 3단계로 분류, 각각의 상황에 맞는 최적의 대응책을 마련해 두고 있다.
◆추진체계도 바꿔야=식량자급률 제고를 통한 식량안보 강화를 위해서는 정책 난맥상을 바로잡는 일도 중요한 과제다. 그동안 농정당국은 국내 생산기반 강화에 초점을 맞춰 수급안정을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지만 물가당국은 손쉬운 수입대책을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여 국내 생산감소의 악순환을 불러오는 일이 적지 않았다. 다행히 수입대책으로 수급을 안정시키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전문가들의 비판이 잇따르자 최근 정부는 만성적인 수급불안 품목 가운데 배추와 건고추·마늘 등에 대해 국산 상시비축제를 도입하고 생산기반 안정을 위한 시설지원 등에 나서는 등 일부 변화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물가당국의 근본적인 시각은 여전해 정책 난맥상은 언제든 되풀이될 수 있다. 식량자급률 하락의 주요 원인 중 하나인 농지감소 문제도 마찬가지다.
정책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적정규모의 농지확보(농지총량관리제)가 필수적이지만 ‘개발논리’의 득세로 우량농지보전 요구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고 있다. 정부 내에서도 적정농지 유지에 대한 입장이 엇갈려 뚜렷한 비전 제시를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방식으로는 새로운 정책 틀과 정교한 추진전략을 짠다고 해도 공염불에 그칠 수밖에 없다. 학계에서 국민적인 합의를 바탕으로 정확한 정책목표를 설정하고 일관되게 추진할 범정부적인 기구를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국책연구기관에서는 농식품의 생산·수출입, 비축·소비·안전·영양·안보·환경·기후 등 국가식품안보정책의 주요 의제들을 다룰 심의 의결기구로 ‘국가식품안보위원회’를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설치·운영하는 방안을 제시해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정부의 선택이다. 새로운 정책 틀과 강한 실행력으로 미래의 식량안보를 굳건히 다져나갈지, 아니면 과거처럼 허울뿐인 목표만 세워 놓고 수급불안에 임시방편으로 대응하는 악순환을 계속할지는 정부의 결정에 달렸다.
이경석 기자 kslee@nong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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