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애그플레이션 비상 유럽발 재정위기에 설상가상… 옥수수·콩값 이미 5년전 추월 국내엔 4~6개월뒤 영향 미쳐 소비자물가 0.4%P 더 오를듯
미국등 세계 주요 곡물 생산국의 극심한 가뭄으로, 밀ㆍ옥수수ㆍ콩 등 국제 곡물 가격이 사상 최고치를 연일 경신하고 있다. 유럽발 위기에 휘청거리는 세계경제가 또 하나의 암초를 만난 셈이다.
곡물 가격 급등은 특히 소득 수준이 낮은 개발도상국 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준다. 생활 물가를 급격히 올려 국민들의 생계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지난 2007~2008년에 있었던 식량 위기는 방글라데시, 멕시코, 이집트 등 30개국에서 폭동을 촉발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본부장은 "글로벌 경제가 침체 국면에 접어든 상황에서 곡물 가격발 물가 급등이 현실화될 경우 세계경제가 성장은 느려지고 물가는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와 물가 상승의 합성어)'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한다.
▲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가운데)이 가뭄과 폭염 탓에 옥수수·콩 등 농작물이 큰 피해를 당한 아이오와주(州) 미주리밸리의 한 농장을 13일 둘러보고 있다. /로이터 뉴시스
◇글로벌 경제 또 다른 '암초'
최근 곡물 가격 급등은 5년 전 세계 식량 위기 직전과 흡사하다. 미국, 러시아 등 주요 곡물 생산국의 가뭄이 극심한 데다, 경기 침체에 대응하기 위해 각국이 풀어놓은 돈(유동성)이 넘쳐 곡물시장에 투기 세력이 많다. 이들 투기 세력은 넘치는 돈으로 곡물 가격 상승에 공격적으로 베팅하고 있다. 오정석 국제금융센터 연구원은 "내년까지 세계적으로 약 4000만t의 곡물생산 부족이 우려된다"며 "미국 옥수수와 콩(대두)의 작황이 2007~2008년 당시보다 못한 데다, 투기 세력은 더 커져 이전 곡물파동보다 상황이 심각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미 국제시장에서 거래되는 옥수수와 콩(대두) 가격은 부셸(25.4㎏)당 각각 8달러와 16달러를 넘겨 2007~2008년 식량 위기 당시의 7달러와 15달러대를 넘어섰다. 주요 20개국(G20)이 이달 중 실무자급 전화회의를 하고, 곡물 값 폭등을 해결하기 위한 정식 대책회의를 9~10월 중 긴급히 열기로 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G20은 내부적으로 최근 식량 가격 급등이 2008년 식량 위기 당시와 같은 개발도상국의 폭동 사태를 부를까 우려하고 있다. 정부 고위관계자는 "G20 회의가 유럽발 재정위기 외에 또 하나의 큰 과제를 떠안게 됐다"며 "각국이 사재기에 나서거나 곡물 투기에 나서지 않도록 제어하는 등의 의제가 우선적으로 논의될 것"이라고 말했다.
◇"연말 물가 오른다" 국내 물가에도 비상등
국제 곡물 가격 변화는 보통 4~6개월 시차를 두고 국내 물가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7월 이후 급등한 국제 곡물 값은 이르면 올해 연말, 늦어도 내년 1분기 이후에는 국내 물가를 끌어올릴 가능성이 높다.
한국은행과 글로벌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애그플레이션(agflation·곡물 가격이 오르면서 일반 물가가 상승하는 현상) 발(發) 물가 상승을 경고하고 나섰다. 한국은행은 최근 내년 물가 전망치를 올해보다 0.2%포인트 올린 2.9%로 잡았다. 이재랑 한은 물가분석팀장은 "국제 곡물 시세는 6개월 정도 시차를 두고 국내 소비자물가에 반영되기 때문에 내년 초쯤 물가 상승 압력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골드만삭스는 최근 "전 세계 곡물 가격 급등이 한국의 식품 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애그플레이션이 올해 말에서 내년 초 한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0.2~0.4%포인트까지 높일 수 있다"고 내다봤다.
문제는 곡물 가격 상승의 영향이 생활 물가 전반에 걸쳐 광범위한데, 우리나라의 식량자급률이 극히 낮아 곡물가격 변동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점이다. 국제금융센터는 "우리나라는 세계 5위의 곡물수입국으로 전체 식량자급률이 2010년 말 기준 26.7%에 불과하다"며 "특히 밀ㆍ옥수수의 자급률은 0.8%, 콩 자급률도 8.8%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각종 가공식품은 대부분 옥수수ㆍ밀ㆍ콩이 원료인 데다, 가축 사료도 거의 대부분 이 세 작물이 원료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지난 7월 국제곡물가격 상승에 따른 영향만 계산해도, 밀가루 가격이 올해 2분기(4~6월)보다 내년 1분기(1~3월)에 27.5% 더 높을 것으로 예상했다. 같은 기준으로 전분은 13.9%, 사료 값은 8.8% 오를 것으로 예측됐다. 연구원 관계자는 "이 같은 예상치는 8월 이후에도 계속된 곡물 가격 상승분은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며 "곡물가격 상승이 지속될 경우, 물가상승폭이 더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 애그플레이션(Agflation)
농업(Agriculture)과 인플레이션(Inflation)의 합성어. 곡물 가격 급등이 식료품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고, 그 영향이 다시 전반적인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는 상황을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