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식품에 얽힌 과학과 문화, 그 깊이에 빠지다 박현진 고려대 식품공학과 교수

누군가 말했던가. 당신이 먹는 음식이 곧 당신이라고. 매일 먹는 음식에는 우리의 삶이 담겨 있다. 박현진 고려대 식품공학과 교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음식의 과학과 문화를 이야기한다. 누구에게나 필요하고 누구에게나 중요한 식품을 탐구하는 일은 그의 직업이자 취미다.
일상 속 맛의 탐구자섬세한 미각은 어린 시절부터 훈련된다. 어떤 음식을 먹고 자라느냐에 따라 한 사람이 느낄 수 있는 맛의 깊이와 폭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 박현진 교수는 그런 점에서 타고난 행운아다. 친가가 경북 안동에, 외가가 충남 서천에 있어 자연스럽게 내륙과 바다 음식을 두루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가 식품공학자의 길을 걷게 된 데에는 이러한 성장 배경이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음식에 대한 깊이가 어렸을 때 형성된다는 걸 아세요? 흔히 말해 먹어본 사람이 맛을 더 잘 안다고 하잖아요.” 안타깝게도 어린 시절에 다양한 맛을 경험하지 못하면, 어른이 되어서도 미묘한 맛의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일례로 똑같이 ‘단맛’이라고 해도 다 같은 단맛이 아니다. 설탕의 단맛이 묵직한 단맛이라면, 꿀의 단맛은 산뜻한 단맛이다. ‘신맛’이라고 아우르는 신맛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산과 당의 비율에 따라 맛이 다르다. 초산이 찌르는 듯한 강한 신맛이라면, 사과산은 상큼하면서도 강렬한 신맛이다. “소금도 성분에 따라 짠맛과 쓴맛이 공존해요. 쓴맛도 구성 성분에 따라 맛의 형태가 모두 다르고요. 식품의 맛은 각기 구성된 식품 성분이 어우러진 결과입니다. 식품의 구성 성분도 원재료를 재배, 사육, 숙성하는 과정에서 계속 달라지고요.” 박 교수의 남다른 미각은 본능적으로 좋은 음식을 찾아서 섭취하게 했다. 그래서일까. 몇 년 후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다는 그의 말이 마치 농담처럼 들렸다. 오래도록 건강하게 생활하려면 좋은 환경과 함께 건강한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 필수라는 상식을 그를 통해 확인한다. “지금 돌아봐도 식품공학을 전공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누구나 자기 전공에 자부심이 있겠지만,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을 평생 공부하는 일은 무척 큰 축복이거든요. 덕분에 평소에도 먹는 것에 늘 관심을 기울이고, 외국에 가도 특색 있는 음식점을 찾아 들르곤 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 여정에서 차곡차곡 쌓아온 미각의 경험이 공학적 지식과 결합하니, 익히 먹던 다양한 음식의 맛이 새삼 새롭게 다가온다. 그 재미난 정보를 혼자만 알 수 없어 2015년 겨울부터 3년간 조선일보에 ‘아하! 이 음식’이라는 칼럼을 연재했다. 얼마 전에는 연재 당시 인기 있었던 칼럼을 모아 <밥상 위에 차려진 역사 한 숟갈>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엮었다. 친숙한 제목처럼 평소 밥상에 자주 오르는 다양한 식품에 얽힌 과학적 원리와 문화사를 쉬운 말로 풀어냈다.

한잔 술에 담긴 패러독스일상의 다양한 식품에 해박한 지식을 지닌 박현진 교수. 그중에서도 그는 ‘와인’에 가장 관심이 많다. 예전에는 그도 와인 문외한이었다. 미국 조지아 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3년간 현지에서 교수로 근무할 때 교수 회의 후 회식 자리에 와인이 자주 등장하면서 비로소 와인에 눈을 떴다. 그러다 프랑스 사람들과 몇 차례 함께 식사를 하면서 와인을 마실 때도 지켜야 할 예법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프랑스 몽펠리에 대학과 공동 연구를 할 때 프랑스에 방문해 함께 식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외국에서 중요한 손님이 왔다고 신경 써서 좋은 와인을 내왔는데, 제가 그만 벌컥 마셔버렸죠. 좋은 와인을 대접받으면 그 와인을 화제로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는 게 와인 매너 중 하나거든요. 이후 프랑스에 들를 때마다 와인 학교에 다니면서 관련 지식을 공부했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결례를 범하고 만 그에게 현지 교수가 “와인을 마실 때도 매너가 있다”며 프랑스에 있는 동안 와인 학교에 다닐 것을 추천했다. 맛있는 와인을 맛보면서 이론 공부를 병행하는 동안 진정한 와인 맛을 깨달은 박 교수. 그는 자신만 와인 애호가로 남지 않았다. 식품공학자답게 습득한 지식을 교재로 잘 정리해 <와인의 향기>라는 책을 낸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10년 이상 고려대에서 와인을 주제로 한 교양 강의를 해왔다. 당시 그의 강의는 수강 신청 기간이 시작되자마자 마감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소문을 듣고 다른 대학 학생이 찾아와 청강을 하기도 했다. “유럽에서는 중요한 비즈니스를 성사시켜야 할 때 고급 와인이 등장합니다. 그 자리에서 와인 예법을 모르면 낭패를 겪을 수 있죠. 고급 와인이 나오면 크게 기뻐하며 와인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아야 합니다. 와인을 화제로 오래 대화할 수 있다면, 그만큼 비즈니스 성공 확률이 높아집니다.” 평생 고지방, 고콜레스테롤 음식을 먹으면서도 건강한 프랑스인들의 비결이 ‘와인’이라고 했던가. 일명 ‘프렌치 패러독스 (French Paradox)’ 현상을 증명하듯 수십 년간 와인을 즐겨온 박현진 교수 역시 믿기지 않을 만큼 활력이 느껴진다. 프랑스에 와인이 있다면, 한국에는 ‘코리안 패러독스(Korean Paradox)’인 막걸리가 있다. 막걸리는 곡류로 만든 발효 식품으로 다른 주종과 비교해 알코올 도수가 낮고 위에 부담이 거의 없죠. 다량의 유산균이 생산한 유기산과 각종 생리 활성 물질이 함유되어 있고요.” 설과 같은 명절에는 막걸리나 청주 등의 전통주를 평소보다 자주 접한다.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지켜야 할 술의 예법이란 또 무엇일까. 박현진 교수는 그 기본을 술이 지닌 고유의 향과 맛에서 찾는다. “모든 술에는 고유의 향이 있습니다. 우선 후각으로 냄새를 잘 관찰한 다음 조금씩 음미하면서 술의 향과 맛을 느끼는 것이 좋습니다. 또 취할 정도로 마시면 안 된다는 기본도 지켜야 하죠.”

미래를 풍요롭게 할 식품공학음식 문화를 널리 알리는 것만큼이나 식품공학자라는 본업에서도 의미 있는 여정을 지나온 박현진 교수. 그 성과를 인정받아 한국과학기술 한림원 정회원, 미국 식품과학회 석학 회원, 세계식품공학회 석학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17년에는 한국식품과학회 회장, 2018년에는 한국키틴키토산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또 국내 굴지 기업의 기술고문과 사외감사이사 등을 맡는 등 산업계와 협업함으로써 한국 식품공학 발전에도 기여하고 있다. 어느덧 한국의 식품공학은 세계적 수준으로 올라섰다. 실제로 그의 연구실에도 중국, 인도, 베트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세계 각국에서 온 유학생이 함께 연구를 하고 있다. 박사 졸업자 40명 중 10명이 외국인일 정도다. 한국에서 배우는 식품 공학이지만, 한국의 원재료만 연구하지는 않는다. “흥미롭게도 한류가 국제 문화를 주도하면서 한국 드라마에 등장한 음식을 보고 한국행을 결심한 유학생이 생각보다 많아요. 한국에 온 유학생들은 자국으로 돌아가 주로 교수로 활동합니다. 그 나라의 식품공학 연구를 이끌어갈 인재이니만큼 연구실에 외국인 학생이 오면 그 나라에서 주로 나는 식품을 연구할 것을 권합니다.”

인간 생활의 세 가지 기본 요소 중 하나인 ‘식(食)’에 관한 연구는 다양한 갈래로 나뉜다. 그중에서도 식품공학은 가정에서 식구를 먹일 음식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수십만에서 수백만명의 사람이 먹을 식량을 대량 생산할 기술을 연구하는 것이다. 최근 주목받는 바이오산업에서도 식품공학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기술이 진화하는 만큼 식품공학의 발전 속도도 눈부시다. “공학은 인간에게 필요하면 생겨나고, 필요 없어지면 사라지는 학문입니다. 그렇기에 식품공학은 인류가 생존하는 한 계속 존재하지 않을까요? 앞으로 사람의 유전정보 분석이 완료되면 개개인의 유전정보에 따라 언제 어떤 병이 걸릴지 높은 확률로 예측할 수 있습니다. 발병한 뒤 치료해야겠다고 생각하면 늦습니다. ‘식의동원(食醫同源)’이라는 옛말이 있지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개개인에게 이로운 음식을 맞춤형으로 섭취하는 시대가 올 겁니다.” 미래 사회의 식품 혁명 길목에서, 박현진 교수는 이미 식품 소재에 적용 가능한 나노 기술을 주로 연구하며 학계와 산업계에 의미 있는 성과를 남겼다. 이제는 그의 발자취를 따라 다음 세대 식품공학자들이 바통을 이어받을 것이다.
 
글 정라희 사진 한상무 장소 협조 복순도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