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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 좋기로 소문난 경북 예천군 용문면 금당실에서 유천 쪽으로 한 오리쯤 가면 구계리가 나온다. 구계저수지 아래 고색창연한 고택이 하나 보이는데 의성 김씨 남악(南嶽) 종택이다. 남악은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의 주역이었던 학봉 김성일의 동생이자 성균관 사성과 풍기군수 등을 지낸 김복일의 호다.
얼마 전 이 종택에서 국내 서지학자들이 깜짝 놀란 일이 하나 있었다. 경북대 연구팀이 종택 유물의 문화재 목록화를 하던 중 국보급 고농서(古農書) 한권을 발견한 것이다. 다름 아닌 계미자(癸未字)본 <사시찬요(四時纂要)>. 계미자는 조선 태종 3년(1403년) 계미년에 만든 조선 최초의 구리활자다. 계미자본은 왜란과 호란·한국전쟁 등 수많은 전란을 거치면서 대부분 소실돼 뜯어진 낱장 한장 가격이 수천만원에 이를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서울대 규장각이 소장한 <십칠사찬고금통요>를 비롯해 간송미술관에 있는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 등이 계미자본으로 모두 국보다. 이에 따라 100장 분량의 온전한 형태로 발견된 <사시찬요> 역시 국보급 문화재로 학계는 평가하고 있다.
<사시찬요>는 중국 당나라 말기 한악(韓鄂)이 편찬한 농서지만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도 초간본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1961년 일본에서 발견돼 학계를 흥분시킨 목판본은 1590년 울산에 있던 경상좌병영에서 인쇄한 책이다. 그동안 국내에서는 조선 효종 때 신속이 <농가집성>을 편찬하면서 수록한 <사시찬요초(抄)>를 통해 내용 일부가 전해져왔다.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 사시 월별 농업기술과 농특산물 가공기술을 담아 월령(月令)체 농서의 효시로 인정받고 있다.
바로 그 <사시찬요>가 600년 넘게 종택의 서궤 속에서 세월을 묵히다가 국보급 고농서로 대접을 받으며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다. 중국의 농서는 기원전 1세기 무렵 한나라 때 범승지가 쓴 <범승지서>를 필두로 6세기 북위 가사협이 편찬한 <제민요술>, 원나라 <농상집요> 등으로 이어지면서 장장 2000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농서는 조선 세종 때 <농사직설>이 편찬되기 전까지 중국의 농서에만 의존해왔다. 그 대표적인 농서 중 하나가 <사시찬요>다.
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밭농사 위주의 중국 농서를 그대로 활용하지 않았고, 벼농사 중심인 우리나라 기후와 풍토에 맞춰 내용을 첨삭했다. 경상좌병영 <사시찬요> 목판본 3월 편에는 ‘목화재배법’이 있는 반면 이번에 발견된 계미자본에는 그 내용이 없다. 결국 목판본 제작 당시 우리 농업실정에 맞춰 원본에 없는 목화재배 방법을 추가한 것이 아닌가 한다.
혹자들은 곰팡내 나는 고농서 한권 가지고 인공지능(AI)·스마트팜 시대에 무슨 호들갑이냐고 타박할 수 있겠지만, 손때 묻은 고농서 속에는 우리 농업기술의 뿌리가 담겨있고, 선조들의 농심이 숨 쉬고 있다.
지금까지 확인된 고농서는 230여권. 여기에 이번 <사시찬요>는 포함되지 않은 만큼 어디에 얼마만큼의 고농서가 고택 궤짝 속 혹은 고서점 서가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볕 볼 날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물론 <사시찬요>를 비롯한 고농서들은 지금의 눈높이로 보면 주술적인 내용이 적지 않다. 그러나 기상위성과 슈퍼컴퓨터가 없던 당시에그것은 오히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경험칙이었을 것이다. <사시찬요> 5월 편은 ‘하짓날에 바람이 남방에서 불면 곡식이 잘 여물고, 구름 한점 없이 날이 맑으면 가뭄이 든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저께 하짓날(21일), 약하지만 곳곳에 동남풍이 불었고 구름도 여기저기 보였다. 지긋지긋한 가뭄이 물러나고 풍년농사를 예견한 <사시찬요>의 신통함되길 기대해본다.
한형수(정경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