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 소녀 하이디’로 유명한 스위스는 국토의 4분의 3이 산악지형이다. 국토가 좁고 경지면적이 부족한 데다 농업경쟁력마저 낮아 오랜 기간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하지만 세계무역기구(WTO) 출범 이후 가속화된 농산물시장 개방에도 농가소득 안정, 자연환경 보전, 일정 수준 이상의 식량자급률 유지 등 정책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해왔다. 농가소득이 도시근로자 가구소득과 큰 격차가 없을뿐더러 식량자급률도 60% 수준에 이른다.
그 배경에는 스위스 ‘연방헌법 제104조’가 있다. 헌법에 독립적으로 농업 관련 조항을 명시한 것이다. 농업의 다원적 기능과 그에 따른 국가의 지원 책무를 매우 구체적으로 제시한 대표 사례로 꼽힌다.
스위스 연방헌법 제104조는 총 4개 항으로 구성돼 있다. 1항에서는 ▲국민을 위한 식량공급 보장 ▲천연자원의 보존과 농촌지역 경관 유지 ▲농촌지역의 분산적 인구정착 유지 등 농업의 기능을 세가지로 정의하고, 연방정부가 농업이 이러한 역할을 다하도록 보장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농업이 식량공급뿐 아니라 다원적 기능을 발휘한다는 개념을 공식적으로 명문화한 것이다. 2항에서는 필요할 경우 자유경제 원칙에서 벗어나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을 지원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았다. 농업의 특수성을 인정해 국가 지원의 근거를 담았다.
3항은 농업직불제 조항이다. 연방정부가 직불정책수단을 통해 다원적·공익적 기능을 제공하는 농민에게 정당한 보상을 지불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아름다운 자연환경 보전, 전통문화 계승, 생물다양성 유지 등 농업이 창출하는 다원적 편익을 국가가 보상한다는 개념이다. 농업이 제공하는 다원적 기능은 대가 없이 무료로 제공되는 공공재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국가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정책 지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 전제가 있다. 농가가 직불금을 받으려면 농약·비료 사용량 절감, 수자원과 환경자원 보호 등 의무준수 조항을 이행해야 한다. 농가 역시 친환경적 농업생산으로 다음 세대에 아름다운 환경을 물려줄 의무가 있다는 뜻이다.
마지막 4항에는 농업조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연방정부가 일반 재원뿐만 아니라 특별 배정된 농업예산을 투자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스위스는 1996년 연방헌법 개정 당시 농업계의 의견을 수렴한 뒤 각계각층의 토론과 협의를 거쳐 최종 국민투표에 붙인 결과 76%의 지지로 농업조항인 제104조를 신설했다. 2015년 기준 스위스의 국내총생산(GDP)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0.6%에 불과하지만, 국가 전체예산 중 5.8%가 농업예산으로 배정됐다. 전체 농업예산에서 직접지불 예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76.2%에 달한다. 농업의 다원적 기능에 대한 정부와 국민의 합의가 이끌어낸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