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식민지로 있던 많은 나라가 독립했다. 이들 중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민주국가로 발돋움한 국가는 아주 드물다. 특히 주목받는 국가가 우리나라와 대만이다. 모두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였던 관계로 민주적 전통도 부족했다. 그럼에도 이 두나라는 공산주의의 위협 속에서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받아들여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현재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한국은 세계 13위 정도, 대만은 세계 20위 정도다. 한때 권위주의적 정치문화로 고통을 겪기도 했지만 굳건히 성장한 중산층의 힘을 바탕으로 민주주의도 달성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탄생한 신생국 대부분이 여전히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독재 정치에 시달리고 있는 점에 비춰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당연히 많은 정치가와 학자들이 이 두 나라를 주목하게 된다. 결론은 성공적인 농지개혁 때문이었다. 농지개혁이 완수되자 지주와 소작농이란 전통적인 신분관계가 혁파됐다. 신분관계의 해체는 평등 인식을 확산시키고 이는 곧 민주 사회로 가는 첫걸음이 됐다. 신분제에서 벗어난 농민들의 자녀들에게 자유롭고 평등한 교육이 제공됐고 이들이 산업화의 역군이 됐다. 마침내 ‘압축 성장’의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해방 직후 엄청난 사회·정치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농지개혁을 단행한 선조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헌법에도 그 원칙이 천명돼 있다. ‘국가는 농지에 관하여 경자유전의 원칙이 달성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며, 농지의 소작제도는 금지된다’는 규정(헌법 제121조 제1항)이 그것이다.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게 한 헌법조문인 셈이다.
하지만 금과옥조라도 시대적 조류에 맞춰 개정돼야 하는 법. 산업화의 진전, 농업인구의 감소로 놀고 있는 농지가 늘어나자 이에 대한 완화도 시도됐다. 그리하여 농지의 임대화와 위탁 경영이 가능하도록 문을 열어 두었다(동조 제2항).
현재 정치권에서는 개헌 논의가 뜨겁다. 2016년 12월 국회는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발족시키면서 “지난 30여년간 국내외의 정치·경제·사회적 환경이 급변해 기존 체제하에서 개별 법률의 개정이나 제도의 보완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여러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하고 “헌법 개정은 더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1987년 헌정체제를 손보지 않을 수 없는 시기가 도래했다. 바야흐로 빈부격차와 경제력 집중의 심화, 사회안전망의 붕괴 등과 같이 국가와 사회의 안위를 흔드는 근본적인 문제가 촉발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헌법에 규정한 경자유전 원칙의 삭제·유지 논란도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다. 그렇지만 오히려 농수산물시장 개방으로 인한 농어촌 경제의 피폐, 도농간의 소득격차 심화, 친환경운동의 강화, 농어민의 노령화와 노동력 부족 등 산적한 문제가 해결책을 기다리고 있다.
거대한 풍랑을 만난 조각배처럼 농민과 농촌 경제는 위태롭다. 경제민주화라는 이념에 기초해 농어촌 경제를 활성화하고 농어민 생활의 안정화를 보장하는 정치적 결단을 어떻게 내릴 것인가? 구한말과 같은 위기가 닥친 엄중한 시기에 향후 21세기 대한민국호를 이끌 제2의 농지개혁과 같은 헌법적 가치를 도출해내야 한다. 최소한 분노와 절망에 짓눌린 농민들이 ‘아스팔트에서 농사를 짓는 일’만은 더이상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야 하건만, 정치권의 주된 관심사는 온통 제왕적 대통령제를 둘러싼 통치체제에만 매몰되어 있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