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3대 환경협약 중 하나로 9월 29일부터 강원도 평창에서 열리는 ‘생물다양성협약 당사국 총회’. 자연 속 생물자원 보존을 위해 계획된 행사지만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종자를 둘러싼 국가 간 이해 불평등을 풀어보려는 취지가 담겨 있다. 수많은 작물 종자를 보유한 나라와 종자 수입국 간 과도한 로열티 부담을 조정하는 방안이 논의되기 때문이다. 그만큼 주요 작물 종자를 두고 각국 간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는 의미다. 조선, 자동차, IT 등 주요 산업마다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우리나라지만 종자 산업만큼은 철저히 후진국이다. 청양고추, 파프리카 같은 농작물을 재배할 때마다 글로벌 종자기업에 거액의 로열티를 지불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IMF 외환위기 이후 종자업체들이 외국에 줄줄이 팔려 나가면서 우리 스스로 종자 주권을 지켜내지 못한 탓이다.
정부는 뒤늦게 국가 전략형 종자 연구개발(R&D) 사업에 나섰지만 질주하는 다국적 종자기업들을 따라잡기엔 역부족이다. 국내 종자 산업을 키우려면 동부팜한농 같은 대기업이 여럿 등장하고 농업에 첨단 IT, BT(바이오기술)를 접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종자 산업 경쟁력을 바탕으로 농업 강국으로 도약할 해법을 찾아본다.
첫 단추는 농업전문기업 양성
세계 종자시장 급성장했지만 우리나라 비중 1% 그쳐
몬산토 등 다국적 기업 성장하는 새 한국은 뒷걸음질 # 지난 9월 12일 미국 농업기업 카길은 “스위스 종자기업 신젠타 때문에 미국산 옥수수의 중국 수출이 급감했다”며 루이지애나 연방법원에 소송을 냈다. 카길은 신젠타가 중국 정부 허가를 받지 않은 유전자조작(GMO) 옥수수 종자 중 하나인 빕테라를 미국 농가에 판매했고, 이 종자에서 자라난 옥수수가 중국 수출을 거부당해 9000만달러가 넘는 막대한 손실을 냈다고 주장했다. 중국은 지난해 11월부터 빕테라 형질이 포함된 미국산 옥수수 통관을 전면 거부한 상태다. 급성장하는 중국 시장을 두고 갈수록 치열해지는 기업 간 경쟁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농업의 반도체’ ‘황금씨앗’으로 불리는 종자 주권을 둘러싸고 세계 각국 경쟁이 뜨겁다. 국가마다 종자 주권을 지키고 우수 종자를 하나라도 먼저 개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종자 패권을 위해선 기업마다 소송전도 불사한다.
작은 씨앗에 불과하지만 세계 종자 시장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국제종자협회에 따르면 세계 종자 시장은 2012년 450억달러(약 47조원)로 지난 10년간 2배 이상 늘었다. 오는 2020년에는 1650억달러로 급증할 전망이다. 종자 교역액도 1990년 30억달러에 불과했지만 20년 새 100억달러에 육박할 정도로 늘어났다.
눈길을 끄는 건 세계 종자 시장 대부분을 몇몇 기업이 싹쓸이하고 있다는 점이다.
몬산토, 신젠타 같은 다국적 기업들은 그동안 전 세계 종자기업을 줄줄이 인수합병하면서 덩치를 불려 왔다. 덕분에 어느새 전 세계 종자 시장의 70% 이상이 이들 몫이 됐다. 국가별로 봐도 미국, 프랑스 등 농업 선진국이 전체 교역액의 절반 이상을 점유할 정도로 ‘승자 독식 구도’ 현상이 두드러진다.
다국적 종자기업이 잘나가는 데는 이유가 있다. 기업마다 매년 1조원 이상을 종자 연구개발에 쏟아붓는다. 전 세계 100여곳에 연구소를 보유한 미국 몬산토의 연구개발 투자액만 국내 전체 종자 시장의 1.7배에 달한다.
종자기업들은 단순히 씨앗뿐 아니라 농업 시장 전체를 장악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몬산토를 비롯한 종자기업들은 대부분 농화학회사를 소유했다. 농약에 맞춰 유전자조작으로 종자를 개발해 농약, 종자를 함께 팔기 위해서다. 예를 들어 몬산토는 대두 종자 ‘라운드업 레디’와 제초제 ‘라운드업’을 같이 판매하는데 유전자조작을 통해 라운드업은 라운드업 레디 대두만 남겨놓고 모든 식물을 죽인다.
글로벌 기업들이 세계 시장을 야금야금 잠식하는 사이 우리나라는 뭘 했을까.
우리나라 종자 산업 규모는 4억달러(2012년 기준)로 세계 시장의 1% 남짓에 그친다. 그나마 식량 작물과 채소 품목 육종기술은 세계적인 수준이라 국내 개발 품종 자급률이 90%를 넘는 건 위안거리지만 문제는 과수, 화훼류다. 국내 과수 자급률은 23%, 화훼는 10% 수준에 그친다. 이렇게 자급률이 낮다 보니 종자 수입량은 2008년 8800만달러에서 2012년 1억2400만달러로 급증했다. 종자 수출액은 수입액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해 해마다 적자 폭이 커지는 실정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국내에는 건실한 종자업체가 꽤 많았다. 하지만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 자본력이 취약한 우리 기업들은 글로벌 종자업체에 줄줄이 팔려 나갔다.
1997년 당시 국내 1위 종자 업체였던 서울종묘는 다국적 종자업체 노바티스에 팔렸다. 이후 노바티스 농업 부문이 스위스 신젠타에 합병되면서 지금은 스위스계 회사가 됐다. 흥농종묘와 중앙종묘는 멕시코 세미니스(현 미국 몬산토)에 팔렸고 청원종묘는 일본 사카타에 인수됐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국내서 주요 작물을 심을 때마다 외국에 로열티를 내야 하는 실정이다.
우리 농가의 효자 수출 품목인 파프리카의 경우 종자는 네덜란드에서 돈을 주고 사와야 한다. 파프리카 씨앗 1g 가격이 12만원에 달할 정도다. 금값의 5배가량 비싸게 거래되면서 ‘황금씨앗’이라고 불린다. 우리나라에 자생했던 구상나무 사례는 더 억울하다. 미국이 한국전쟁 때 이 나무 종자를 가져가서 전 세계 크리스마스트리로 팔아 막대한 로열티를 챙긴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국내 농가들이 작물 종자를 사용하면서 외국에 지불한 로열티는 2004년 50억원에서 2010년 219억원으로 4배 넘게 늘었다. 매년 수백억원씩 로열티를 내야 하는 ‘종자 후진국’이란 얘기다.
이를 보다 못한 우리 정부도 팔을 걷어붙였다. 종자 특허를 보호하는 한편 수출 종자를 개발하고 수입 종자를 대체하기 위해 ‘골든시드(Golden Seed)’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2021년까지 5000여억원을 들여 수출 종자 20개를 개발하고 종자 수출액을 2억달러까지 늘린다는 야심 찬 계획도 세웠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농가 스스로 경쟁력을 높이지 않으면 정부 역할만으론 부족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얘기다. 자본력이 풍부한 대기업과 탄탄한 기술력을 보유한 전문 종자기업이 협력해 세계 종자 시장을 공략해야 한다는 주문이 쏟아진다.
이를 위해선 IT, BT를 비롯한 의약, 소재 산업과 융합해 종자 산업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 실제로 세계적 제약회사들은 다국적 종자기업 지분을 계속 사들이는 중이다. 신젠타는 스위스 제약회사 노바티스가, 몬산토는 미국 제약사 파마시아가 대주주다.
외환위기 이후 종자기업 줄줄이 팔려
외국에 지불하는 종자 로열티 수백억
정부 나서서 수출종자 개발 주력해야 종자 산업을 키우려면 농업 전문기업을 꾸준히 육성해야 한다. 한국종자협회 회원사 중 매출액이 100억원을 넘는 업체는 10여곳에 불과하다. 그나마 매출 676억원(2013년)으로 국내 1위 종자기업이었던 농우바이오는 농협에 팔리는 신세가 됐다.
박현태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영세한 국내 종자기업이 난립한 만큼 이들이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정부의 파격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신품종 개발을 통한 제품 수출에만 힘쓸 게 아니라 기술 자체를 수출해 외국 현지에 적합한 품종을 개발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멀리 보면 농업을 첨단산업화해 국내 농업 경쟁력을 높이는 것도 절실하다. 중국은 ‘농업 산업화’ 정책을 통해 전문기업을 육성하는 한편 도시 자본의 농업 진출을 전면 허용했다. 일본도 대기업의 농업 참여를 유도해 영세한 농가 생산성을 높이는 전략을 추진 중이다.
한 종자기업 관계자는 “동부팜한농이 아시아 최대 규모의 유리온실을 지으려다 농민단체 반발로 물러날 정도로 농업 산업화가 어려운 실정이다. 농가 힘만으로는 농업 경쟁력을 높이기 힘든 만큼 기업 자본을 끌어들인 후 규모의 경제를 통해 농업 경쟁력을 키워야 할 때”라고 말했다.